먼저 뜬 숫자

by Diana L.

전년 대비 12% 증액. 예산 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담당자가 AI에 초안을 요청해 받아 둔 것이었다. 영업은 더 올려야 한다고 했고, 재무는 내려야 한다고 했다. 두 시간 뒤 9%로 정리됐고, 회의록에는 "검토 끝에 9% 합의"라고 적혔다. 참석자들은 충분히 검토했다고 느끼며 회의실을 나왔다.

이 회의에서 30%에서 출발해 논의를 시작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1974년 에이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너먼은 "닻 내림 효과"라는 이름으로 심리 현상을 설명했다. 즉, 판단을 시작하기 전에 눈에 들어온 숫자가, 그 뒤의 모든 판단을 자기 주변에 묶어 두는 현상이다. 두 사람은 참가자를 두 집단으로 나눠 각각의 앞에서 룰렛을 돌린 뒤 UN 회원국 중 아프리카 국가의 비율을 물었다. 룰렛이 10을 가리킨 집단의 답은 중앙값 25, 65를 가리킨 집단은 45였다. 룰렛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참가자들도 알고 있었고, 정확히 맞히면 돈을 준다고 했지만 효과는 줄지 않았다. 앞서 12%라는 수치가 떠오르는가? 만약 30%로 시작했다면 어떤 결과였을까? 트버스키와 카너먼의 실험은, 사람은 먼저 보여진 숫자에서 출발해 추정치를 조정하게 되고, 그 추정치는 초기값 쪽으로 치우친다고 설명한다.

이 문제는 실험실 밖에서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 실제 거래에서는 출발점에 끌리는 판단이 비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12년 베이커·판·워글러 연구팀은 1984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에서 이뤄진 인수합병 7,020건을 분석했다. 인수 제안가는 대상 기업 주가의 52주 최고가 쪽으로 끌려 올라갔다. 그 가격을 조금이라도 넘기는 순간 거래 성사 확률이 4.4~6.4%포인트 뛰었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 올라간 프리미엄이 클수록 인수하는 쪽 주가 반응은 더 나빴다. 52주 최고가 때문에 올라간 프리미엄이 10% 늘 때마다, 인수하는 쪽의 발표 시점 주가 반응이 2.45% 더 나빠졌다. 닻에 끌려간 대가를 사는 쪽 주주가 돈으로 냈다는 뜻이다. 52주 최고가는 기업의 가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눈에 뛸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끌려가는 쪽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연구도 있다. 1987년 노스크래프트와 닐의 연구에서 현직 부동산 중개인 47명이 실제 매물을 직접 둘러보고 감정가를 매겼다. 받은 자료는 모두 같았고 호가만 달랐다. 호가가 12만 달러로 적힌 자료를 받은 중개인들은 평균 11만 4천 달러로, 15만 달러로 적힌 자료를 받은 중개인들은 평균 12만 9천 달러로 감정했다. 호가 차이가 3만 달러 벌어지자 감정가는 1만 4천 달러 넘게 따라 움직였다. 정작 호가를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중 하나로 꼽은 중개인은 8%뿐이었다.

AI가 숫자를 내놓기 시작하면서 이 문제에 새로운 조건이 더해졌다. 룰렛이나 호가는 적어도 눈앞의 숫자가 어떤 경로로 제시됐는지 드러난다. 반면 AI가 내놓은 숫자는 그 산출 근거를 바로 확인하기 어려울 수 있다. 대신 몇 문단의 설명이 붙어 있고, 그 설명은 대체로 그럴듯하다. 설명이 있다는 이유로 근거까지 검토됐다고 받아들이면, AI의 초안은 검증을 거치기도 전에 회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2026년 Organization Science에 실린 연구에서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컨설턴트 758명이 실험에 참여했다. AI를 쓴 쪽은 대부분의 과제에서 더 빨랐고 결과도 좋았다. 그런데 AI가 잘 다루지 못하는 유형의 과제 하나에서는 정반대였다. 정답을 낸 비율이 AI를 쓰지 않은 집단보다 19%포인트 낮았다. 흔히 말하는 'Garbage in, garbage out' 의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AI가 먼저 제시한 틀린 방향에서 출발해, 거기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 결과를 닻 내림 효과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과제에서 도움이 된 도구라도 특정 과제에서는 판단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전제를 인정하고, AI가 먼저 제시한 방향에서 사람들이 충분히 벗어나 반론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회의실의 합의는 검토의 결과가 아니라 출발점의 결과였고, 9%는 따져서 나온 숫자가 아니라 12%에서 조금 내린 숫자라는 걸 기억하자. 그런데 회의록에는 결론만 남고, 중개인 대부분이 호가를 고려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적은 것과 같은 일이 회의록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다음 회의는 대개 9%에서 출발한다.

도구가 숫자를 더 빠르고 더 그럴듯하게 내놓을수록, 리더는 그 숫자가 논의의 기준이 되는 순간을 살펴야 한다. 다음 회의에서 가장 먼저 던질 질문은 “이 숫자에 동의합니까?”가 아니라 “이 숫자를 보기 전에, 각자는 무엇을 근거로 어떤 수치를 생각했습니까?”다.


SOURCES

Tversky, A. & Kahneman, D. (1974). Judgment under Uncertainty: Heuristics and Biases. Science, 185(4157), 1124-1131.

Baker, M., Pan, X. & Wurgler, J. (2012). The effect of reference point prices on mergers and acquisitions. Journal of Financial Economics, 106(1), 49-71.

Northcraft, G.B. & Neale, M.A. (1987). Experts, Amateurs, and Real Estate: An Anchoring-and-Adjustment Perspective on Property Pricing Decisions.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39(1), 84-97.

Dell'Acqua, F., McFowland, E. III, Mollick, E.R., Lifshitz-Assaf, H., Kellogg, K., Rajendran, S., Krayer, L., Candelon, F. & Lakhani, K.R. (2026). Navigating the Jagged Technological Frontier: Field Experimental Evidence of the Effects of AI on Knowledge Worker Productivity and Quality. Organization Science, Articles in Advance(2026-03-11).

이전
이전

선택의 들러리

다음
다음

가려진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