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쓰라고 했을 뿐인데

by Diana L.

AI 도구를 도입하고 석 달이 지났다. 공지는 한 줄이었다. “업무에 도움이 되는 곳에 자유롭게 쓰십시오.” 그런데 사용 기록을 열어 보니 A팀은 대부분 쓰고 있었고, B팀은 거의 쓰지 않았다. 팀장 둘에게 물어봐도 뚜렷한 이유는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A팀 노트북에는 그 기능이 켜진 채로, B팀에는 꺼진 채로 설치돼 있었다. 팀마다 대폴트값을 다르게 쓰기로 협의한 것도 아닌데, 설치 시점이 다른 이유로 기본이 정해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주어지는 선택지를 기본값이라고 한다. 기본값은 다른 선택지를 없애거나 특정 선택을 강요하지 않지만 출발점을 정한다. 그대로 둘 것인지, 직접 바꿀 것인지의 작은 차이가 결과를 크게 바꿀 수 있다.

2004년 이식 분야 학술지 Transplantation에 실린 실험이 이를 보여준다.

에릭 존슨과 대니얼 골드스타인은 161명에게 장기 기증 의사를 물었다. 조건은 세 가지였다. 기증자가 아닌 상태에서 시작해 바꿀 수 있게 한 조건, 기증자인 상태에서 시작해 빠질 수 있게 한 조건, 기본값 없이 직접 고르게 한 조건이다. 결과는 옵트아웃(거부권 행사 / 사후 거부, 예: "Unsubscribe") 쪽 동의율이 옵트인(적극적 동의 / 사전 동의, 예: "마케팅 이메일 동의") 쪽의 약 두 배였다.

이건 온라인 설문에서 나온 차이다. 실제로 등록하는 것도 아니고, 서류를 작성하거나 관공서에 갈 필요도 없었다. 클릭 한 번으로 선택을 바꿀 수 있는데도 동의율은 두 배 가까이 벌어졌다.

같은 연구에서는 유럽 국가들의 실제 동의율도 비교했다. 기증하려면 등록해야 하는 나라들과 거부하려면 등록해야 하는 나라들 사이에는 약 60%p의 차이가 있었다. 문화와 종교, 의료 제도도 다른 만큼 이 차이를 모두 기본값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실제 제도에서도 기본값의 차이가 큰 동의율 격차와 함께 나타났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장기 기증은 드물고 무거운 결정이다. 매일 반복하는 업무 판단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 연구가 던지는 질문은 조직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이 아직 선호나 판단을 분명히 정하지 못한 영역에서는, 기본값이 그 판단을 대신하고 있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질문은 효과의 크기를 넘어선다. 기본값이 사람들의 행동에 이만큼 영향을 준다면, 그 기본값은 누가, 어떤 목표로 정하는가.

캐스 선스타인과 리처드 세일러는 2003년 시카고대 로리뷰 논문에서 중립적인 기본값은 없다고 썼다. 누군가는 선택해야 하며, 그 상황에서는 어떤 형태의 개입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논의한 정책 설계의 맥락에서는 기본값을 정하는 주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정책 담당자라는 사람이 있었고, 소속이 있었으며,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조직에 들어오는 도구의 기본값은 누가 정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설정뿐 아니라 화면의 배치도 비슷한 문제를 만든다. 무엇을 켜 두느냐에 더해, 무엇을 먼저 눈에 띄게 하느냐가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영국 행동인사이트팀이 2024년에 수행한 실험이 있다. 영국 성인 5천여 명에게 정부 웹페이지를 보여주고 답을 찾게 했더니, 챗봇에 말을 건 사람은 평균 40%였다. 그런데 챗봇이 페이지 전체에 떠 있을 때는 53%가 말을 걸었고, 화면 구석의 작은 상자에 있을 때는 31%와 26%에 그쳤다. 챗봇의 성능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달랐다. 동료심사를 거치지 않은 컨설팅 회사의 자체 보고서라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화면 설계가 이용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방향을 보여준다.

이 실험은 기본값 자체를 비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용자가 명시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도구의 설계가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는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화면은 누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만들었는가.

상자의 크기를 정한 사람은 정부기관의 정책 담당자일 수도, 화면을 만든 팀의 구성원일 수도 있다. 이용률을 높이는 것이 그 팀의 목표였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 주체를 지목하는 일이 아니라, 화면을 설계한 사람의 목표와 그 서비스를 도입한 조직의 목표가 일치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 조직도 다르지 않다. 어떤 AI 기능이 켜진 채로 배포되는지, 어떤 제안이 화면에 먼저 뜨는지, 기능을 끄려면 몇 단계를 더 거쳐야 하는지. 이런 조건은 실제로 도구를 쓰는 업무부서가 아니라 외부 공급업체나 내부 기술부서에서 정해질 수 있다. 그들에게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달성하려는 목표가 업무부서의 목표와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뜻이다.

정책은 회의에서 정해지고 문서로 남지만, 기본값은 설치 파일에 딸려 와 검토도 기록도 없이 그대로 유지되기 쉽다. 그러면 조직은 “자유롭게 쓰라”는 정책만 정했다고 생각하지만, 직원들의 실제 행동에는 이미 다른 결정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조직이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설정이 사실상의 운영 기준이 되는 것이다.

기본값을 없앨 수는 없지만, 조직이 검토하고 명문화할 수는 있다. 어떤 기능을 켜 두고 어떤 기능을 꺼 둘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정해 문서에 남기는 것. 그때부터 기본값은 설치 과정에서 따라온 설정을 넘어, 조직이 책임지고 설명할 수 있는 정책이 된다.

“왜 이렇게 일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에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라는 답이 돌아온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물어야 할까. 지금의 방식을 유지할 이유를 찾는 일부터가 조직이 내려야 할 첫 결정일지 모른다.


SOURCES

Johnson, E.J. & Goldstein, D.G. (2004). Defaults and Donation Decisions. Transplantation, 78(12), 1713-1716.

Sunstein, C.R. & Thaler, R.H. (2003). Libertarian Paternalism Is Not an Oxymoron. The University of Chicago Law Review, 70(4), 1159-1190.

Behavioural Insights Team (2025). Adopt: AI & Human Behaviour. Behavioural Insights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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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의사결정과 다양성의 역설